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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81 April 2026

의료와 인문

◎ 의사의 역사(2)

김 택 중대한의사학회 회장

한국 의사의 전문직 형성 과정
서구 의사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근대 국가에서 전문직이란 국가로부터 배타적인 독점권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직종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에 상응하는 국가적 면허제도는 19세기 이전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 왕조에서도 생소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의원(醫員), 즉 의사가 되기 위한 별도의 과정이나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제의 잡과(雜科) 응시를 거쳐 관료가 된 소수의 의관(醫官)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본인이 원하면 의사임을 자처할 수 있었고, 따라서 사실상 누구든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의사가 특화된 전문직으로서 법제화된 것은 1900년 ‘의사규칙(醫士規則)’이 반포된 대한제국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규칙 제2조를 보면 의과대학과 약학과의 졸업장을 가지고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의사로 규정하였으며 이들 외에는 의료 행위를 금지하였다. 다만 여기서 의사란 오늘날 의사와 한의사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근대식 의사 양성이 본격화되기 전 공포된 이 의사규칙은 1910년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1899년 대한제국이 설립한 관립 의학교를 졸업한 한국인 의사 인력이라고 해 봐야 1910년 당시 수적으로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구처럼 이익 집단으로서 독점권을 획득하기 위한 사회적 투쟁에 나설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인 1913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의사규칙(醫師規則)’이 반포된 뒤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총독부가 한의사를 배제하고 서구식 의사만 의사로 규정한 까닭에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가 법적으로 이미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 문명에 압도당한 당시 상황에서 과학을 앞세운 서구 학문인 의학을 공부한 의사들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서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의사들 스스로도 새 시대의 최고 전문 학문을 습득한 지식계급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근대 한국에서 의사의 전문직 형성 과정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식민 종주국이었던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주도와 통제하에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의 의사들은 수적으로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쟁 관계에 있던 다수의 한의사들을 어렵지 않게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의사들의 높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서구 의사들과 달리 의료 독점권을 쟁취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경험 없이 위로부터 갑자기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전문직으로서 직업적 자율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라는 역사적 상황은 이러한 특성을 더욱 왜곡, 심화시켰다. 식민지 조선의 한국인 의사들은 이미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굳이 식민권력에 맞서 연대하고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한국인 의사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적 차별을 받아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 후 진로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관공립 및 사립의 대형병원 취업도 쉽지 않았고, 의학교 교원이나 관료가 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식민지의 피지배자 신분으로 직접 의료 정책에 관여하여 제도 변화를 꾀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그들에게 남겨진 주요 대안은 개인 의원 개업이었다. 의원 경영에 몰두했던 식민 지배 하의 한국인 의사들은 점점 개인주의화되어 갔고, 정치적 이익 집단으로 성장하지도 못하여 의료 영역에서 자율적인 통제를 주도할 만큼 내부 역량을 키울 수도 없었다.

광복 이후 취약한 재정 상태와 미국 의료의 영향 등으로 의료 공급자 역할을 축소시킨 국가를 대신하여 의사들이 민간 영역에서 의료 서비스를 주도하게 된 뒤에도 한국 의사들의 이러한 특성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의사들은 다른 의료직종들과의 경쟁에서 점차 주도권을 잃게 되었고, 이는 의료 시장에서 이전에 유지하고 있던 독점적 지위까지 침식당하게 되는 부정적 결과로 이어졌다. 1951년 국가가 한의사 제도를 법제화하여 한의학을 제도권 의학으로 격상시켰을 때, 그리고 2000년 의약분업 안이 포함된 개정 약사법의 시행으로 약사의 권리가 신장되었을 때 의사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례에 해당한다.

법치를 근간으로 한 민주주의가 심화된 지금, 한국 의사들 앞에는 국가 권력과 시장 권력에 대응하여 시민 사회와 연대하면서 시민으로서 어떻게 전문직의 자율성과 내부 역량을 신장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다.

한국 전통 의학의 현대화 과정과 한의사의 전문직 형성 과정
서구 의학과 한의학의 제도적 병존을 추구하던 대한제국이 1910년 일본에 멸망당한 뒤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서 한의사들은 급격한 제도적 차별을 겪게 되었다. 서구 의학만을 의학으로 인정한 조선총독부가 1913년 ‘의사규칙(醫師規則)’을 반포하면서 대한제국과 달리 서구식 의학교육을 받은 자만을 의사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총독부는 ‘의생규칙(醫生規則)’을 반포하고 한의사들에게 별도의 의생 면허를 부여하여 의사직에서 배제하였다. 의생 면허의 부여는 한편으로는 총독부가 한의사들을 제도권 의료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의생이라는 호칭에는 사실 의사가 되지 못한 학생 또는 조수라는 차별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본에 한의학이란 식민지 조선의 미개와 후진을 대표하는 상징이었으며, 총독부의 한의학 정책 기조 역시 비과학적인 한의학에 대한 불신과 궁극적인 폐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자국에서도 1868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전통 의학을 학문이 아닌 기술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한방(漢方)’으로 격하하고 ‘한방의(漢方医)’를 제도적으로 배제해 나갔다. 18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대학과 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들이 매년 꾸준히 배출되어 의사 공급 체계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한방의 제도를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따라서 한방의에 대한 신규 면허를 폐지하는 방식으로 의사 직종을 일원화시켰다. 총독부가 이러한 전례를 따르지 않고 일찍이 합병 초기에 한의사들을 의생으로 공식화하고, 나아가 한의학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내내 의생 제도를 유지한 것은 의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민지의 현실 때문이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인 1874년 이미 ‘난방의(蘭方医)’를 포함하여 서구식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가 5,000명 이상 활동 중이던 일본과 달리, 식민지 조선은 의사규칙과 의생규칙이 반포된 이듬해인 1914년 총독부 통계를 보면 그간 양성된 한국인 의사 수가 전국적으로 144명에 불과했다.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의사를 모두 합쳐도 641명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등록된 의생 수는 5,827명에 달하였다. 1943년에 이르러 전체 의사 수가 한국인 2,618명을 포함하여 3,813명으로까지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인구 대비 절대적 의사 부족 상태는 여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합병 초기 총독부는 의사에 비해 다수였던 한의사를 없애지 못하고, 대신 소수인 의사의 지휘 감독하에 보조 인력인 의생으로 활용하는 일종의 타협책을 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일제 강점기 내내 지속되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약품 부족 사태에 처하자 총독부는 그 대체제로서 한약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의학 정책의 기조 역시 전과 달리 우호적으로 바뀌지만, 그럼에도 총독부는 학교 설립을 통한 한의사 육성이라는 공식적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다만 전통적인 도제 방식으로 배출된 한의사들에게 의생 시험 합격을 조건으로 의생 면허를 부여했을 뿐이다. 초창기부터 시행된 의생 시험에 전염병학과 위생학은 필수과목이었다. 따라서 한의사들은 시험 합격을 위해 기본적인 의학 공부를 해야만 했다. 총독부는 이렇게 해서 배출된 의생들을 방역 등 위생행정에 동원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1945년 광복 이후 한의학의 현대화 과정에 일정 부분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한의사들은 일제 강점기 총독부의 의생규칙 반포로 인해 의생으로 격하되고 의사직종에서 배제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한의사들의 직업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서구 의학 중심의 의료 체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재정 능력이 취약했던 국가는 의료 공급을 주도하지 못하고 민간 영역에 그 역할을 넘겨주면서 1970년대까지 자유방임적 의료 정책이 지속되었다. 한의학에 대해서도 일제 강점기처럼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통제 정책 대신 방임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뜻하지 않게 한의학이 부흥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광복 직후 민족 문화 부흥이 중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부상하면서 국회의원들 또한 한의학의 복권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한의사들도 자신의 지위 신장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종래 의생이던 한의사에게 정식으로 ‘한의사(漢醫師; 1986년부터 韓醫師로 변경)’라는 명칭과 더불어 의사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국민의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면허권을 쟁취한 한의사들은 이후 내부 발전에 주력하였다. 대한한의사협회와 각종 학회를 설립하여 조직을 강화하였고, 의과대학을 모방한 한의과대학들을 설립하여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한의학 지식의 표준화를 달성해 나갔으며, 전문의 제도를 도입하고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급속한 전문화의 길을 걸어갔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의학과 한의학으로 양분된 현행 이원적 의료 체계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의학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지금과 같이 의학을 모방하여 과학화를 추구하는 식으로 전문화를 심화시켜 나간다면 현대 의학 체제에 의외로 빠르게 흡수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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