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성 우파인메딕스 대표
세계 최대 의료기기 회사 중 하나인 메드트로닉 (Medtronic)의 시작은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작은 차고였다. 두 명의 젊은 엔지니어 (Earl Bakken & Palmer Hermundslie)가 병원의 전자 장비를 수리하던 작업실에서 이 회사는 출발했다. 그들의 일은 처음에는 단순했다. 고장 난 의료 장비를 고쳐 병원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의학과 공학이 만나는 혁신의 상징이 되었다. 1957년 할로윈 밤, 도시 전체에 정전이 발생했다. 당시 심장수술 환자들은 콘센트에 연결된 외부 심박동기에 의존하여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전기가 끊기자 장비가 멈추었고, 환자의 생명은 위태로운 순간을 맞았다. 그 사건 이후 의사 (C. Walton Lillehei)는 엔지니어에게 전기가 없어도 작동하는 심박동기를 만들 수 없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되었다. 단 4주 만에 배터리로 작동하는 작은 심박동기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의료기기의 역사를 바꾸는 발명이 되었다. 의학의 혁신은 연구실에서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정전 같은 우연 속에서도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Alvin Toffler)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 (The Third Wave)>에서 인류 문명을 세 번의 거대한 물결로 설명했다. 첫 번째 물결은 농업혁명, 두 번째 물결은 산업혁명, 그리고 세 번째 물결은 정보와 기술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의료 역시 이 흐름 속에서 변해왔다. 산업혁명은 병원과 제약 산업을 만들었지만, 제3의 물결은 기술을 인간의 몸속으로 들여보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전자 회로, 혈관을 통과하는 미세한 기구, 몸속에서 병을 치료하는 장치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의학이 아니라 의학과 공학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모든 나라에서 같은 속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일을 해왔다. 처음 이 길을 선택했을 때, 한국에서 의료기기를 만든다는 일은 결코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 의료기기 산업 기반이 오래전부터 형성된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 의료기기를 개발한다는 일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정밀 부품을 공급하는 기반도 부족했고, 의료와 공학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생태계도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품 하나하나를 국내와 해외에서 찾아야 했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부품을 공학자의 힘을 빌려 새롭게 설계해야 했다. 의료기기를 개발한다는 일은 단순히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산업의 기반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기기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의학이 환자를 치료하는 학문이라면, 의료기기는 그 치료의 가능성을 넓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공학은 그 치료를 현실로 만드는 장치를 만든다. 이 두 영역이 만날 때 의료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작은 부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했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실제 의료기기로 완성되기까지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실패와 수정,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개발한 기구가 환자의 치료에 사용되는 순간, 그 모든 과정의 의미는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의료기기의 역사는 언제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까?” “몸속에서 직접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더 안전하고 정밀한 치료 도구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의학을 공학으로 이끌고, 공학은 다시 의학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오늘날 의료는 점점 더 기술과 깊이 결합하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디지털 기술이 의료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치료의 방식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물결의 시작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변화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를 더 잘 치료하고, 생명을 더 오래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열망이 기술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차고에서 시작된 작은 회사가 세계적인 의료기기 기업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의료의 미래 역시 어디선가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병원 어느 공간에서 던져진 작은 질문이나 연구실 한구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그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의학과 공학의 만남은 단순한 학문의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두 가지 지식이 서로 손을 잡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계속되는 한, 의료의 미래 또한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