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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59 April 2024

오피니언

◎ ‘상아탑’ 굴레에서 벗어나야 올바른 의료 발전의 길에 닿는다.

김 충 기이화의대 내과학

‘의대공화국’, 오늘날 한국을 표현하는 여러 단어 중 하나이다. 물론 이는 의대를 지망하는 수험생과 학부형의 과열된 선망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 뜨거운 관심과 선망에 비하여 현업에서 느끼는 정서를 생각해본다면 그 단어에 담긴 역설에 냉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학벌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진 이후 우리 사회는 효용을 더욱 지향하고 있다. 과학과 산업 발전의 성과가 누구나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지금 시점에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과 건강의 가치에 닿아 있는 의학과 의료에 대한 기대가 치솟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의학과 의료의 첨단에 위치한 의과대학, 그리고 의대 교수들은 그간 경험하지 못한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학 교수들은 지성을 대표한다는 위치에 서서 사회를 향해 가치를 전달하거나 대중 앞에서 의견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에 ‘순수하게’ 충실했던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권력에 맞서 정의와 진리를 주장하는 절개 있는 이들도 있었으나, 흔한 것은 곡학아세 하며 理가 아닌 利를 쫓는 이들이었다. 이에 대부분은 자신의 학문에만 집중할 뿐 사회에 대해 생각하거나 발언해야 할 특별한 이유나 의욕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경향은 교수들이 자신의 학문 분야가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관심조차 소홀히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교수들은 사회 전반의'지성의 등대' 역할보다는 각자의'상아탑'에 갇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전문가'로서만 헌신하였다.

의대 교수들은 대학에서 그러한 경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주체들이다. 점점 더 세분화되는 전문 영역에서 기술과 과학의 최전선에서 이뤄야 하는 학문적 성취와 함께 경쟁적이고 비효율적인 의료 환경에서 수익 추구에 내몰린 대다수의 의대 교수들은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의학 연구와 진료에만 몰두하며 병원 밖의 세상은 물론, 병원 내부의 사회적 합리에도 무감각했던 교수들이 현재 겪고 있는 큰 혼란과 변화에 대한 충격은 당연한 결과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커녕, 제대로 드러내고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에 이르기까지 대학은 너무나 열악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와 관련하여 교수들이 스스로 풀어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

1. 잠재된 문제들을 드러내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2. 어떻게 위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제시할 수 있을까?
3. 궁극적으로 대학은 사회로부터 권위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과거에 많은 국민들이 권위 있는 지성인에게 가치 판단을 기꺼이 맡겼지만, 이제는 각자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겠다고 자처하고 있다. 개인이 제시하는 의견은 항상 체계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건전하고 활발한 소통을 통한'집단 지성'의 역량은 가볍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대중을 현혹하는 데에 능수능란한 ‘비전문가’ 혹은 ‘거짓된 전문가’들의 선동에 현혹될 위험 또한 가볍지 않다는 점에 있다. 거짓과 선동에 대항해 전문가를 넘어 신뢰할 수 있는'지성'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 교수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당장 시작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은 ‘소통의 시작’이다. 많은 문제는 소통하지 못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했다. 현재의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해법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근본적으로 체계 내의 이해와 합의로 나아갈 수 없는 현재의 열악한 소통 구조 속에서 늘 개인 혹은 소수의 의견이 과잉대표 되고 비판에 직면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확인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 자체가 집단의 integrity(정직과 공정, 혹은 분열되지 않은 집단으로서의 완전함)을 강화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이어서 이를 바탕으로 ‘협력적인’ 체계의 구축으로 이어져야 한다. 의대정원 증원의 광풍이 불어온 지 벌써 2달가량 지났음에도 여전히 의료계는 무력하다. 일관된 정부의 무능과 무모한 독단으로 인해 의료계 전반의 협력과 소통 부재가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대학도 다르지 않다. 많은 교수들의 생각과 의지가 서로 소통하고 합의를 위한 토론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체계는 여전히 부재하다. 아무리 수직적 구조가 공고한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최상위 의사결정 체계만으로는 어떠한 내부적 의사 결집도 이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이뤄진 결정은 집단 전반으로부터 존중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상당하다. 비상 상황 속에서도 정상적인'사회'로서의 소통과 협력의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는 의료계와 대학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하다.

위 두 가지는 비단 의료계 내부의 관점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의학이나 진료의 범위를 넘어서, 의료계 내부의 사회적 문제와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지, 그리고 의료와 밀접한 상호작용을 하는 다양한 사회 주체나 요소들과의 연계를 통해 어떤 책임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의 노력과 헌신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인식 전환과 강력한 의지가 필수적일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의료 전반의 위기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를 기회로 삼아 의료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준비에 나서야 한다. 그 출발은 ‘상아탑’의 틀에서 벗어나 의료계의 다양한 주체, 사회와의 소통과 협력을 모색하는 노력이 될 것이다. 구체계의 한계를 절실히 인식하는 전공의들과 학생들, 여느 때보다 의료 문제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는 국민들, 현실 인식에 대해 새롭게 눈뜨는 많은 교수들까지,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집단과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문제를 분명히 설정하고,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속 가능한 의료 발전을 위한 인식 전환과 노력이 더 이상 지체될 수 없는 중대한 시점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이제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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