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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20 October 2020

기획특집
- 사법계가 의료계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 성 낙대한의학회 고문, 가천대학교 명예총장,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요즘 국내 의료계에서 펼쳐지는 갈등 국면을 보노라면 필자가 의대 초년생 시절 본 영화 두 편의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장면 1. 추운 겨울, 한 60대 유대인이 알프스 산악지역을 필사적으로 걷고 있다. 그 뒤를 ‘나치 경찰관’이 집요하게 쫓고 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영화는 바야흐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무릎이 묻힐 정도인 드넓은 설원(雪原)에는 몇 채의 집만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절체절명의 추격전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노인이 문득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곤 돌아서서 뒤쫓아 오던 나치 경찰관을 여유 있게 바라본다. 노인 뒤에는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 푯말이 보인다.
쫓아오던 나치 경찰관은 이내 걸음을 멈추고 추격을 포기한다. 허탈해하며 손에 쥐었던 권총을 총집에 거둔다. 쫓기던 노인은 아슬아슬하게 국경을 넘어 스위스 땅을 밟았고, 추격자는 권총의 사정거리에 있는 그를 잡을 수 없다. 노인이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 설원에는 국경선임을 가리키는 푯말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화는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선(線)이 있음을 강변하고 있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그 감격스러운 장면이 기억에 생생하다.

#장면 2. 다섯 명이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재판정에서 담당 판사는 죄수복 차림의 살인 용의자 다섯 명을 심도 있게 심문한다. 관객에게는 그 다섯 피고인 모두가 살인자 같다. 그리고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심정적으로 그 다섯 명 중 한 명이 살인자일 거라고 짐작한다. 다섯 피고인은 판사 앞에 극도로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윽고 재판장이 선고를 내린다. 첫 번째 피고인, 혐의 없음. 당연히 무죄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피고인도 혐의 없음. 무죄 판결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마지막 다섯 번째 피고인이 살인자? 그러고 보니 살인 혐의가 가장 짙었던 피고인이다! 피고인은 창백한 얼굴로 재판장을 쳐다본다. 그런데 재판장은 그에게도 역시 혐의가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린다.
필자는 영화를 다 본 후에도 혼란스러웠다. 필자의 독일어 실력이 부족해 이해를 못 한 걸까 싶어 동행했던 친구에게 그러한 판결의 근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혹시라도 무고한 피고인이 살인죄 누명을 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판결이라고 대답했다. 고교생 시절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은 배웠어도 무죄 추정 원칙은 미처 배우지 못한 터였다. 법정 판결은 정황이 아닌 확실한 증거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며, 모든 피의자는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의료 사건·사고 관련 국내 재판 과정과 재판정의 판결을 살펴보면 서양 문화권과 달라도 너무 달라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대법원의 한 판결을 예로 들어보자. 근래 한의사들이 임상에서 치료 기기로 폭넓게 쓰이는 레이저(Laser)의 한 종류인 IPL(Intense Pulsed Light)을 환자에게 쓰겠다고 주장해 1심 및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2010년). 그런데 대법원은 한의사도 ‘IPL’ 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소위 서양 의학의 최첨단 의료 기기를 말이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의사 면허만 있으면 누구나 레이저 기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IPL 치료’를 받아보면, 그게 얼마나 무서운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요컨대 환자 보호는 안중에도 없는 판결인 것이다. 사법계가 의료 시스템에 큰 교란을 일으킨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연방행정재판소(Bundesverwaltungsgericht)’에서도 유사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2014년 1월 17일). 치과 의사가 환자의 안면, 즉 구강(口腔) 밖 병변에 레이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법원에 소를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법원의 판결은 우리와 매우 달랐다. 치과 의사의 치료 범위는 입술 경계선 안에 있으므로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한 것이다. 재판장은 그러면서 오랜 의학 전문 분야가 각기 고유 영역을 지키며 발전해온 학문적 경계선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사법계가 ‘정황’을 참작해서 내린 판결이 국내 의료계에 얼마나 큰 혼란을 일으킬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나 ‘레이저 기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 다양한 분야의 의사들이 너도나도 ‘레이저’로 환자를 치료할 것이다. 굳이 어렵고 고된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는 근래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의료계의 왜곡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의료계의 직종 간, 지역 간 쏠림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깊고 긴 한숨만 나오는 현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얼마 전 구속된 의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비교적 나이 든 82세의 ‘장(腸)폐색증’ 환자를 조치하던 중 불행히도 환자가 사망했고, 그 이유로 두 자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담당 교수를 법정 구속한 것이다. 도주 위험이 있다면서 말이다. 담당 주치의인 교수에게 의료상의 과실이 있다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도주 위험이 있다며 법정 구속이라니,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판결이 아닌가 싶다.

분명 앞으로 그 교수의 후배들은 사고 발생 가능성이 낮은 분야로 시선을 더 돌릴 것이다. 정황에 따라 사법계가 내린 판결로 인해 국내 의료 체계의 왜곡이 가속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부끄럽고 암담하고 걱정되어 후배 의사들 보기가 민망하기까지 하다. 참담하기 그지없다. 다른 어떤 분야도 아닌 사법계가 이런 왜곡을 부추기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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