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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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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기영 (1914 ~ 2002) 평생 DNA 연구와 생화학에 정열을 바친 진정한 학자.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이기영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의학교육을 받고 해방과 더불어 광복된 조국에서 기초의학의 길을 택하고, 일생을 오로지 생화학 특히 핵산의 연구에 몰두하여 ‘진정한 학자’ 또는 ‘학자다운 학자’의 귀감이 된 우리나라의 대표적 의학자이다.

이기영교수는 1914년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태두인 이병도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의 엄격한 교육과 학문적인 집안분위기에 따라 의학자의 길을 일찍이 정하였다. 1932년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1936년 경의전을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 생화학교실에 들어가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주임교수인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밑에서 5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고 나가사키의과대학에 가서 3년간의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박사학위과정이 끝날 무렵인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져 그의 논문과 관련자료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해방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영교수는 경성대학 의학부 생화학 교수가 되었고, 실험기구의 미비로 연구를 할 수는 없었으나 서울의대를 비롯하여, 광주의대, 이화의대 등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한편 1948년 6월 대한생화학회를 주도적으로 발족시켰으며 초대부터 13대(1961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중 프랑스정부 초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52년 12월에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연구소에서 선생은 도시락으로 김밥을 먹고 저녁 늦게 전철이 끝나기 직전까지 실험실에서 하루 종일 실험에 열중하여 프랑스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955년 8월 제3회 국제생화학회에서 발표한 각종 세균 63종에 대한 DNA염기조성을 염기비(GC ratio)를 분석하여 세계 최초로 진화적 관점에서 미생물의 생물계통적 분류가 가능함을 제시하여 큰 반향을 얻었다. 선생은 이 후에도 고등생물세포의 DNA염기조성을 연구하였고, 마침내 파리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 5월 이기영 교수는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돌아왔으나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때까지 2~3년이 걸렸다. 실험실 기구가 마련되면서 이기영 교수는 자신의 평생의 프로젝트인 DNA염기분석을 계속하여 1970년대 초까지 동식물 66종의 DNA염기조성을 분석했고,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1979년 여름, 34년의 서울의대 교수생활을 마칠 때 까지 이기영교수는 오로지 DNA분석과 강의에만 집중했다. 대한생화학회 회장을 제외하고 선생이 행정직이나 학교보직을 맡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학자는 행정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정년 퇴임 후에도 80세가 된 1994년 까지 영남의대, 인제의대 등에서 연구와 강의를 계속했다. 특히 1981년부터 1988년 까지 8년 동안 재직한 영남의대에서는 스스로 ‘내 인생의 최고의 연구 환경’이라고 했을 정도로 오로지 연구 활동에만 전념하여 이곳에서 DNA간의 계통학적 분기점을 연구하고, 한국 야생식물의 암에 관한 연구 등을 계속 수행하였다. 칠순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최고수준의 연구에 몰두한 그의 학자로서의 소신과 연구 열정은 후학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기영교수는 철두철미하게 학자로서의 삶을 살은 우리가 자랑 할 수 있는 학자다. 오로지 DNA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한 선생의 생애는 사심 없는 진정한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수준 높은 생명과학이 이기영 교수의 연구업적과 열정에 힘입은바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