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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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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갑수 (1893 ~ 납북) 우리나라 생리학회의 창시자.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이갑수 교수는 한국의 최초의 생리학자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사를 지내며 생리학연구와 학생교육에 정진했고, 조선의사협회 창립과 활동을 주도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생리학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하고 발전시켰으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발전에 기여한 한국 근대의학계의 선각자이자 생리학계의 태두였다.

이갑수 교수는 1893년 11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강직하기로 이름난 변호사였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오카야마(岡山)의학전문학교로 유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19년부터 1923년 까지 선생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생리학교실에서 조수로 연구생활을 했으며, 이로써 최초로 생리학을 전공한 한국인이 되었다.

1926년 이갑수 교수는 귀국하여 경성제대 생리학교실의 조수가 되어 신경과 흥분전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주임교수 오츠카교수의 자극생리학에 영향을 받아 선생은 신경의 흥분전도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의학회잡지 등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930년 선생은 ‘신경의 흥분전도의 본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선생은 심호섭, 윤일선 등과 함께 일본인 의사단체에 대항하여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조선의사협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 단체에서 오늘날의 회장에 해당하는 간사장 일을 보았다.

1931년 9월 이갑수 교수는 경성제대 강사로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학생교육과 연구에 힘썼다. 선생은 1932년 최초의 우리말로 된 의학학술지인 ‘朝鮮醫報’를 발간했다. 이 학술지는 그 내용과 수준에서 우리나라 학자가 만들어낸 첫 번째 공식 간행물이었다. 일본학생이 3/4이상인 경성제대에서 생리학 강의 시 선생은 꼭 한복을 입었고, 학생들이 싫어한다고 학교 당국이 한복을 입지 말라고 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한복을 고집한 것으로 보아도 선생의 나라 사랑을 알 수 있다.

이갑수 교수는 신문 잡지에도 많은 글을 써서 의학지식의 보급을 통해 한국인의 건강상태 향상, 나아가 한국의 발전 근대화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수명과 생식의 관계 및 장수법’의 연재 (동아일보, 1932), 등을 통해 생명, 몸, 삶과 죽음, 건강 등에 관련된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위생사상의 향상 및 보급을 조선의사협회를 중심으로 매달 좌담회를 하여 결핵을 비롯한 전염병과 그 예방법에 대해 강연 혹은 단행본을 출판하여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 사람을 위한 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 이갑수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우리 학회를 가져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1945년 11월 서울 관수동의 그의 자택에서 이종륜, 김명선, 남기용 등 15명이 회동하여 조선생리학회를 창립했다. 이는 기초의학 분야 학회 중 최초였다. 선생은 초대 회장이 되어 6대까지 역임하면서 학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된 의과대학에서 초대 심호섭에 이어 1947년부터 1950년까지 학장을 맡아 이른바 국대안 파동과 좌우 이념대립으로 인한 혼란을 진정시키고 학사운영을 정상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또 입법의원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갑수 교수는 서울의대 학장과 대한생리학회 회장을 동시에 맡았던 기간에는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였으나, 평소에 몸에 붙은 연구활동과 교육에의 열성으로 학교와 학회를 이끌었다. 1948년 9월에 중학교 교육용 생리위생 도서인 ‘인류계(人類界)’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한글로 쓰인 첫 생리학 교과서이다. 이갑수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생리학이 자연과학이면서 인생의 지침이 되는 학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생명현상과 신체의 구조 등 가장 기초적 개념을 설명하고, 인체의 각 기능을 쉽게 풀어 썼다. 책 말미에는 해방 전에 그가 관심을 보였던 질병과 위생에 대해 기술하였다. 그는 신체에 해를 끼치는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보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건강할 수 있는 몸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갑수 교수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이로써 한국 의학계와 생리학의 발전을 위한 그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그가 남긴 나라 사랑과 의학의 사랑은 두고 두고 후학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