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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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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오긍선 (1878 ~ 1963) 국내 피부과학교실 창설의 주역이며 세브란스의전 한국인 초대학장.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오긍선 교수는 1878년 10월 4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계속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6년 선생은 스승의 추천으로 서울에서 내부 주사(주사)로 근무했다.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896년 10월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학내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고학했다. 그러다가 학생 자치조직인 협성회(協成會)에서 간부로 활동하던 것이 문제가 되어 체포령이 내려져, 미국 선교사 스테드만의 집에 머물며 한글을 가르치고 선교 사업을 돕다가, 독립협회사건이 수습된 후 배재학당에 복귀해서 결국 190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에 내려가 침례교 신자가 된 오긍선은 1901년 여름 스테드만의 소개로 군산 야소병원장으로 부임한 미국 선교사 알랙산더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인연이 되어 알렉산더와 함께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주선으로 남장로교의 입학금과 생활비 보조로 1902년 켄터키주 센트럴대학에 입학하여 교양학부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그가 신학을 전공해 한국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의학을 전공해 선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같은 주 에 있는 루이빌의과대학에 편입하였다. 1907년 3월 루이빌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을 마친 후 선생은 그해 10월 미국 남장로교에서 한국에 파견하는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했다.

배재학당 벙커교장은 귀국한 오긍선을 곧바로 순종의 전의로 추천했으나 그는 당초 예정대로 군산 야소병원장으로 봉직하면서 교육 사업에도 매진했다. 1910년에는 광주 야소병원장도 겸임하면서 나환자 구료에서 힘썼다.

1912년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가 미국 북장로교 단독에서 남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기관이 됨으로서 오긍선선생은 남장로교를 대표하여 세브란스의학교의 조교수로 취임했다. 당시 그는 세브란스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서 영어 이해가 떨어지는 학생을 위한 보충강의도 맡았다. 1915년 총독부가 사립학교령을 개정하고 전문학교 교수에게 일본 학위를 요구하자, 오긍선교수는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피부비뇨기과학 교실에 들어가 1년간 연구하고 돌아와 1917년 귀국하여 세브란스의전 피부비뇨기과 주임교수 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의학교육에 충실하는 한편, 경성 고아구제회를 결성하고 1919년 경성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22년에는 경성보육원 이사장이 되었다.

1921년 오긍선교수는 세브란스의전에 신설된 학감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교장인 에비슨이 연희전문하교 교장까지 겸임하게 되면서 한국인에게 학사 업무를 인계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오긍선은 학칙을 개정하여 교풍을 확립하고, 교과과정을 개편하여 일본어 수업을 줄이고 영어 시간을 늘였다. 또 입학자격에 신자가 아닌 사람도 포함시켰다. 또 오긍선 교수는 세브란스의전에 대한 일본 문부성의 지정을 받기위해 노력했다. 문부성지정이 있어야 세브란스의전 졸업생들도 경의전이나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생들 처럼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과 만주에서도 의료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34년이 되어서야 세브란스의전이 지정을 받게 되었다.
1934년 4월 오긍선교수는 에비슨의 뒤를 이어 세브란스의전의 제2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기존의 임상위주의 학풍을 지양하고 윤일선, 이석신, 정일천 등 유능한 타 대학 출신 기초의학 연구자들을 교수로 개용하고, 기초의학교실 조수에게는 임상의 조수보다 보수를 2배로 주는 등 기초의학 부문의 강화에 힘썼다. 1942년 선생은 자신이 추진한 정년제에 따라 세브란스의전을 떠났다.

1945년 해방 당시 오긍선교수는 이미 68세였다. 미국통으로 알려진 그에게 여러 분야에서 그를 청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해방 전부터 애정을 쏟았던 고아 구제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에도 여러 가지 공직을 제안 받았지만 사양하고 전쟁 중 1951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사회사업연합회를 설립해 회장직을 수행 했다. 오긍선 교수는 1963년 5월 18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