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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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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심호섭 (1890 ~ 1973) 내과학회, 서울의대, 대한의사협회의 개척자로서 국가에 큰 공헌.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심호섭 교수는 구한말에 태어나 현대의학을 공부하여 내과와 정신과를 전공으로 후진의 양성과 환자의 진료를 통해 우리나라 임사의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학자요 교육자다.

심호섭 교수는 1890년 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무렵은 서울 상인들 사이에 청과 일본 두 나라 상인들의 침투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어 있던 무렵이라 그의 유년은 이런 가정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17세 때인 1906년 효제소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에 따라 남대문상권의 한국인이 세운 광성상업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년 가까이 상점 점원 노릇을 하였다. 어느 날 친척 문병 차 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가 그 친척의 병이 빠르게 치료 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09년 선생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입학하여 1913년 우등으로 졸업하고 동시에 총독부의원 조수가 되었다. 한편 그는 1911년 총독부가 고아, 행려병자, 정신질환자를 위해 만든 제생원 의원에도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풍부한 임상경험을 쌓았다. 1913년 총독부의원에 정신과가 신설되는데 선생은 정신과 전문가인 미즈츠 신지(水津信治)와 함께 과의 신설과 진료를 도왔다. 이것은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정신과 의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1916년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을 때, 선생은 바로 경의전의 조교수가 되었다. 신규 발령된 14명의 조교수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정신과의 특성상 환자와의 대화가 통하는 의사가 필요했던 것도 심호섭 교수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교수로 임명된 이유 중에 하나였다. 1917년 5월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정규 전문학교로 인가되면서, 심호섭 교수는 경의전을 사임하고 세브란스의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과 와 신경과를 담당하는 강사의 직위였다. 선생은 세브란스에 가서 질병 명칭 등 의학용어를 일본식 용어에 맞추어 통일하고 이를 의학교육에 활용하였고 의학교과서 번역에도 기여하였다. 1912년 조교수로 승진하였으나 세브란스의전 출신도 아니고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던 선생을 차별한 다른 한국인 교직원 등 의 이유로 사직서도 제출하지 않고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개원했다.

통영에 내려 간지 6개월 만에 심호섭 교수는 더 깊은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제대 이네다(稻田)내과에 들어갔다. 선생은 이곳에서 연구에 몰두하여 1925년 11월 ‘식물성 신경독이 당 동화작용 및 배출역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일본의학협회에서 시상하는 의학계 최고 권위의 ‘은사금패상(恩賜金牌賞)을 받았다.

1926년 의학박사가 되어 귀국한 심호섭 교수는 다시 세브란스의전에 복귀하여 내과를 맡았다. 학생들은 그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여 ‘내과의 귀신’이라 칭송 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그에 대해 ‘이러한 학자를 가졌다는 것은 실로 조선에 한 빛’이라고 썼다. 선생은 잠자리에 들 때 말고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시간을 지키는 것이 철저하기로 유명하였다.

심호섭 교수는 대중계몽 활동가이기도 했다. 1926년 실력양성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인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세브란스의전 기독학생청년회에서 주최하는 통속의학강연회에도 자주 연사로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적 한국인 의사단체인 조선의사협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1934년에는 한성의사회 회장이 되었다.

1935년 심호섭 교수는 돌연 세브란스의전을 사직하고 서울 관철동에 병원을 내고 환자 진료에만 몰두했다.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고초를 치렀고, 그가 애착을 갖고 지켜왔던 조선의학협회와 한성의사회도 1939년과 1941년 각각 강제 해산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선생이 제일 먼저 한 것은 9월 7일에 최초의 분과학회인 조선신경정신의학회를 창립한 것이다. 그해 10월 선생은 경의전 교장이 되었다. 이어 12월에 창립된 조선내과학회에서도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경성대학의학부와 경의전이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만들어 지면서 심호섭 교수는 초대 학장이 되어 두 학교 통합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을 원만히 이끌 수 있었다.

1960년 말 선생은 진료하던 병원을 닫고 서울 미아리에서 조용히 은퇴생활을 보내다가 1973년 3월 1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영면하기 직전까지고 그는 각종 집담회나 학회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심호섭교수는 대한제국의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에서 대한민국의 서울의대 학장이 되기까지, 한성의사회와 조선의학협회 임원에서 대한의학협회 회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경의전, 세브란스의전, 서울의대 교수와 개원의를 두루 거치면서, 의학자이자 의학교육자이며 의사단체의 대표자로서 한국 의료 근대화를 상징한 의료계의 거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