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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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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나세진 (1908 ~ 1984) 우리나라 해부학의 선구자.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나세진 교수는 한국전쟁, 사회적 빈곤 같은 역경 속에서도 학생 교육에 매진하고 우리나라 해부학의 기틀을 잡아준 공로자다.

선생은 1908년 10월 23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경성제2고등보통하교를 거쳐 1926년 경성제대 의학부에 입학했다. 1932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선생은 워낙 임상을 하기위해 외과교실에 들어갔다가 결핵으로 요양을 하던 중, 마음을 바꿔 기초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1934년에 경성제대 해부학교실에 입국하였다.

나세진 교수는 체질인류학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논문으로 1943년 경성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반성인자에 의한 유전양식의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된 4편의 논문을 조선의학회잡지에 게재함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체질인류학자가 되었다.

1939년 나세진 교수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이때 그는 31세의 젊은 교수였다. 선생은 당시만 해도 극소수였던 여성 의료인을 제대로 양성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학생지도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경기도 조선인의 체질인류학적 연구’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나세진 교수는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국립서울대학교의 해부학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교육에 전념하였다. 1947년 나세진 교수는 정일천, 이명복등 과 함께 조선해부학회를 창립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나세진 교수는 육군에 입대하여 소령(후에 대령)으로 육군병원과 중앙병리연구소에서 봉사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선생은 서울의대에 복귀하여 해부학 주임교수와 교무과장을 맡아 학교와 교실의 복구에 매진했다. 1958년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유학하고 미국식 해부학을 한국에 도입했다. 1958년 장신요 교수와 함께 대한체질인류학회를 창립하였다. 이 학회는 대한해부학회와 함께 우리나라 해부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60년부터 4년 간 서울의대 학장으로 의대 재건에 진력했다. 한편 선생의 체질인류학적 연구는 계속되어 ‘한국인의 체질유전에 관한 연구’, 한국인 학생의 도별 체격측정성적보고‘등의 논문과 ’한국인의 체질‘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나세진 교수는 우리나라 의학용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육언어가 바뀌는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우리 해부학용어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강조하였고, 의학용어가 독일어, 일어에서 영어, 라틴어로, 그리고 한글로 변화하는 과정을 학회 차원에서 정비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1956년 전문학회의 용어집으로는 처음으로 ‘해부학용어(제1판)’을 발간하였다.

나세진 교수는 어려운 시절에 비교적 순탄한 가정 환경아래 수학하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을 교육하면서 대한해부학회를 창립하고 뒤이어 대한체질인류학회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해부학의 기틀을 잡아준 학자요 교육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