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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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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홍기 (1919 ~ 2002) 우리나라 이비인후과학 연구와 후진양성, 그리고 대학병원의 역할 정립에 헌신. (헌정일 : 2013-03-26)

공적사항

김홍기는 한국전쟁후의 열악한 시기에 연구에 매진하였고 병원장의 위치에서 서울대학교병원이 지금의 현대식 시스템을 갖추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을 뿐 만 아니라 병원 홍보, 병원 경영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병원개혁의 의지를 천명한 성실한 학자이자 유능한 행정가였다.

김홍기는 1919년 9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부 김진환(金晉桓)은 1912년 종합인쇄소인 보진재(寶晉齋)출판사를 설립했고, 부친 김낙훈( 金洛勳)은 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1937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 을류에 입학하였고 1944년 9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이비인후과에 입국하였다. 광복 후 1949년 국립서울대학교 이비인후과 강사가 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51년 육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였고 1954년 10월 전역 후 국립서울대학교 이비인후과에 복직하였다.

1955년 국립서울대학교 이비인후과 부교수로 발령받고 전후 이비인후과학교실과 의국의 재건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57년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연수하며 세계적인 이과학자인 보이에스(Lawrence R. Boies) 교수로부터 등골가동술 및 후두적출술을 사사하고 현대식 귀 수술법을 도입함으로써 중이염 수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이비인후과 주임교수가 되어 우리나라 이비인후과학이 독일식을 따른 일본 의학에서 벗어나 미국식 의학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를 토대로 이비인후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 난청의 가장 흔한 원인이었던 중이염에 많은 관심을 갖고 병리조직학적 연구와 청력손실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어음청력검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우리말 검사어표를 작성하고 표준화하는데 기초가 되는 여러 연구를 수행하여 국내에서 처음 발표하였다.

그는 이비인후과학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대한이비인후과학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1966년 대한청각학회를 창립하고 초대~3대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나라 청각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5년 대한이비인후과학회 초대 이사장을 맡아 대한이비인후과학회의 발전과 도약을 이루어냈다. 국제학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1979년~1987년 아세아-대양주 이비인후과학회 연합회 이사 및 1983년 제5차 아세아-대양주 이비인후과학회 학술대회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한일이비인후과학회를 결성하고 한국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학자로서 진료, 교육 및 연구뿐 만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 1968년 9월 제10대 서울의대 부속병원장에 취임한 그는 1978년 제13대 서울의대 부속병원장까지 재임하였고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서울의대 부속병원의 신축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78년 7월 14일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 초대원장으로 발령받았고 1978년 7월 15일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병원 병원보 창간사에서 김홍기는 병원홍보와 병원 경영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숭고한 인간존중의 정신으로 병원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병원개혁의 의지를 천명했다. 아울러 세계적인 서울대학교병원을 꿈꾼 그는 교육, 연구, 진료가 삼위일체가 된 균형 잡힌 병원을 목표로 제시하였다.

김홍기는 2002년 9월 29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 속에서도 이비인후과학 연구와 교육을 통해 한국 이비인후과학의 탄생과 발전을 주도했고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이 정식으로 출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비인후과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정진한 훌륭한 학자였다. 또한, 최초의 현대식 대형병원을 설립하는데 기여하고 도덕성과 인격, 사랑을 실천한 리더였으며,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대비하는 판단력과 창의력, 강력한 실천력을 갖춘 뛰어난 의료행정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