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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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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주병 (1902-1985) 최초의 한국인 약리학자이자 군진의료 및 의무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긴 의학자 (헌정일 : 2014-04-08)

공적사항

박주병(朴柱秉)선생은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22년 졸업했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선생은 이듬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대학 병리학교실을 거쳐 당시 뇌하수체 연구의 메카였던 프라이부르그대학 약리학교실로 옮겨 3년간 정통 실험약리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1926년에는 뇌하수체후엽의 자궁수축물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약관 25세에 약리학 박사가 된 선생은 큰 뜻을 품고 귀국하였으나 일본 당국은 최초의 한국인 약리학자를 외면하고 교직의 자리를 주지 않았다.

박주병 선생은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발길을 돌려 북경청화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고 후에는 상해의 레스터 연구소로 옮겨 ‘중국의 의료용 약물’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서울로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생화학교수인 이석신 선생과 함께 연구를 하였으며, 교직을 원했으나 일본의 압박으로 어렵게 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외국박사 학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학교수가 되려면 반드시 일본의 의학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은 할 수 없이 1942년 만주의과대학에서 ‘에페드린의 약리’라는 논문으로 일본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국이 광복되자 선생은 오랜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선생이 원했던 서울대학교 약리학 교수는 전임자가 있어 어렵게 되어 경성여자의과대학에 출강하면서 미군정청 사회부 보건국장에 취임하였다. 재임 중인 1947년 대한(조선)약리학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1953년까지 학회를 이끌었으며, 대한의학협회 학술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해군에 입대(대령)하여, 해군의무감에 임명되었고 1954년에는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7년간의 재임 중 그는 외유내강의 성격에 청렴결백하고 인자한 덕장으로 뛰어난 어학실력과 해박한 지식, 고매한 인격으로 국군은 물론 미군 장병들의 존경도 받았다. ‘해군의무단지’를 창간하고 군의관들에게 군진에서도 학술활동을 계속하도록 솔선수범하였다. 그의 공로로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